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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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CPGB)은 1920년 창당되어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영국 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창당 초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혁명적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했으며, 이후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CPGB는 노동조합 운동,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 반대, 파시즘과 인종차별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 인도 공산당 창당을 지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등 국제적인 연대 활동도 전개했다. 1945년 총선에서 2석을 얻으며 최대 지지를 받았으나, 이후 당세가 쇠퇴하여 1991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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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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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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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CPGB |
창립 | 1920년 7월 31일 |
해산 | 1991년 11월 23일 |
본부 | 마르크스 하우스, 코번트 가든, 런던 |
신문 | "모닝 스타" "마르크스주의 투데이" |
학생 조직 | 공산주의 학생 |
청년 조직 |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 (YCL) |
최고 회원 수 (1945년) | 60,000명 |
해산 당시 회원 수 (1991년) | 4,742명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 분파: 유럽 공산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
국제 조직 | 코민테른 |
채널 제도 제휴 단체 | |
기타 제휴 단체 | |
합병 | |
후계 | |
주요 인물 | |
총 서기 | 앨버트 잉크핀 (초대) 니나 템플 (마지막) |
2. 역사
1920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여러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CPGB)이 창당되었다.[14] 창당 초기에는 노동당과의 관계 설정 문제를 두고 내부 논쟁이 있었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중재로 노동당 내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후보를 내는 방식을 택했다. 1922년 총선에서 샤푸르지 사클라트왈라와 월턴 뉴볼드가 당선되었으나, 지노비예프 서한 사건 등으로 인해 노동당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26년 영국 총파업 전후로 당 지도부가 투옥되기도 했지만, 파업 기간 동안 당원 수가 증가하며 특정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CPGB는 코민테른의 '제3기' 정책에 따라 사회 민주당과 노동당을 '사회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22]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코민테른은 '인민 전선' 정책을 채택했고, CPGB도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른 세력과의 동맹을 모색했다.[22] 1935년 영국 총선에서 윌리 갤러처가 당선되었으며,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에서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맞서 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CPGB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4] 그러나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자, 전쟁 지지로 입장을 바꾸고 제2전선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26] 1945년 영국 총선에서는 윌리 갤러처와 필 피라틴이 당선되어 의회 내에서 최대 의석을 확보했다.[28] 1951년에는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강령을 발표하여 평화적 사회주의 전환 가능성을 제시했다.[31]
전후 CPGB는 주요 노조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며 노동 운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당내 분열을 초래했다.[35]
사무총장 (출생–사망) | 취임 | 퇴임 | 총리 |
---|---|---|---|
라자니 팔메 더트(Rajani Palme Dutt) (1896–1974) | 1939년 10월 | 1941년 6월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
해리 폴리트(Harry Pollitt) (1890–1960) (2번째) | 1941년 6월 | 1956년 5월 13일 |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
처칠 | |||
앤서니 이든(Anthony Eden) |
연도 | 이름 | 장소 | 날짜 |
---|---|---|---|
1943 | 제16차 대회 | 런던 | 10월 3–4일 |
1944 | 제17차 대회 | 쇼어디치 타운 홀, 런던 | 10월 28–29일 |
1945 | 제18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11월 24–26일 |
1947 | 제19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2월 22–24일 |
1948 | 제20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2월 21–23일 |
1949 | 제21차 대회 | 리버풀 | 11월 26–28일 |
1952 | 제22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4월 11–14일 |
1954 | 제23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4월 16–19일 |
1956 | 제24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3월 30일 – 4월 2일 |
1960년대 이후 중소 분쟁과 프라하의 봄을 거치며 당내 노선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58][59] 1970년대 유럽 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전통적인 노선과 갈등을 빚었고, 1977년에는 영국 신공산당이 분리되었다. 1980년대에는 유럽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지도부와 반대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1988년 영국 공산당이 창당되며 분열되었다. 결국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좌파 싱크탱크인 '민주 좌파'로 전환되었다.
2. 1. 창당 배경 및 초기 활동 (1920-1929)
코민테른이 전 세계에 공산당을 설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20년에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CPGB)이 창당되었다. CPGB는 영국 사회주의당, 사회주의 노동당의 공산주의 통일 그룹, 사우스 웨일스 사회주의 협회 등 여러 소규모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합병하여 결성되었다.[14] 전국 길드 연맹의 길드 공산주의 분파, 다양한 노동조합 대표 및 노동자 위원회, 사회주의 클럽 및 개인, 러시아 불간섭 운동 관련 인사, 독립 노동당의 여러 지부와 많은 개인 회원들도 참여했다. 영국 사회주의당 소속 국회의원 세실 L'Estrange Malone도 CPGB에 합류했다. 창당 대회 며칠 후, 신생 정당은 주간 신문 "공산주의자"를 창간했으며, 편집자는 레이먼드 포스트게이트였다.[15]1921년 1월, CPGB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공산당 (제3 인터내셔널 영국 지부)와 스코틀랜드 공산 노동당 다수가 통합에 동의하면서 재창당되었다. 이 정당은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직후 영국에서 정치적 급진주의가 고조되던 시기에 레드 클라이드 운동을 통해 대표되기도 했다.[16][17]
창당 협상 과정에서 "의회주의" 문제와 노동당과의 관계 설정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의회주의는 선거 참여와 기존 의회를 통한 활동을 의미했는데, 이는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전략이었고, 사회 민주주의와의 단절을 원하는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비판론자들은 의회주의가 개혁주의로 이어져 사회주의 활동보다 표 획득에 더 큰 중요성을 두게 하고, 기회주의자들을 유입하며, 자본주의 통치 기관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이 '개혁주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과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노동당과의 제휴도 반대했다. 이러한 좌익 공산주의 입장은 실비아 팽크허스트와 윌리 갤러처 등이 지지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은 반대 입장을 취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질병''에서 CPGB가 노동조합 및 사회 민주주의 정당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노동 계급의 기존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그러한 조직이 권력을 잡으면 노동 계급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고, 노동자들은 환멸을 느껴 공산당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레닌의 의견이 우세했다.
CPGB는 초기에 노동당 내에서 활동하려 했지만, 당시 노동당은 주로 좌익 단체들의 연합체로 운영되었고 1918년부터 개인 회원을 허용했다. 그러나 제임스 맥스턴 독립 노동당 대표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공산당과의 제휴를 반대했다. CPGB는 제휴를 추진하고 노동당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려 노력하면서 의회 선거에 자체 후보를 내세웠다.
제휴가 거부된 후, CPGB는 당원들에게 노동당에 개인적으로 가입하여 지지나 후보 지지를 구하도록 권장했다. 1922년 총선에서 샤푸르지 사클라트왈라와 월턴 뉴볼드가 당선되었다. 1923년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회는 공산당 의회 후보를 지지했으며, 38명의 공산주의자가 1923년 노동당 대회에 참석했다.[18] 1923년, 당 기관지 『노동자 주간』에 J. R. 캠벨이 작성한, 영국군 병사들에게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서한이 게재되었다. 노동당 정부의 램지 맥도널드 총리는 이 편지를 「불온선동법」 위반으로 기소했지만, 재검토 후 철회했다. 이로 인해 자유당은 노동당 정부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고, 결국 맥도널드 내각은 사임했다.
위조된 지노비예프 서한 사건은 1924년 10월 말 총선에서 발생했다. 이 서한은 영국 공산당이 영국군 등에서 전복 활동을 벌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10월 29일 총선에서 보수당 당선을 돕기 위한 조작이었다. 아마도 SIS(MI6)나 백계 러시아 반혁명 세력의 소행일 것이다.[19][20]
노동당은 선거에서 보수당에 패배한 후, 그 책임을 지노비예프 서한에 돌렸다. 캠벨 사건과 지노비예프 서한 사건 이후, 노동당은 공산당원들을 제명하고, 노동당 국회의원 후보 출마를 금지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 이후에는, 이 결정에 반대하거나 공산당에 동조한다고 여겨진 26개 선거구 노동당을 해산했다.[18]
1920년대와 1930년대 대부분 동안, CPGB는 혁명적 간부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하기로 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영국 지부로서 CPGB는 상위 기구의 결정을 이행했다.
이러한 결정은 1926년 총파업 직전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는데, 당시 CPGB 중앙 지도부 대부분이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12명이 "선동 음모" 혐의로 기소되었고, 5명은 1년, 나머지는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의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자체 역할을 포기하고 노동조합 회의 일반 평의회에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 기간 및 광부 파업의 고통 속에서 CPGB 당원들은 파업을 방어하고 광부들과의 연대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1926년과 1927년 동안 탄광 지역에서 당원 수가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성과는 제3기 동안 많이 잃었지만, 수십 년 후 당 해체까지 지속될 특정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웠다.
CPGB는 특정 직업, 특히 중공업, 섬유, 광업 분야에 종사하는, 당과 정책에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배출했다. 이러한 지지는 탄광 지역, 글래스고와 같은 산업 도시, 유대인 거주 런던 동부 지역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론다 계곡의 마에르디는 타인 위어의 초프웰과 함께 공산주의 성향으로 ''작은 모스크바''로 알려졌다.
1920년대 동안, CPGB는 인도 최초의 공산당 미래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훈련시켰다.[21] 필립 스프래트와 벤 브래들리는 미루트 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21] 그들의 재판은 영국 대중에게 인도에서의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호치민, M. N. 로이, 가타야마 센과 같은 코민테른의 아시아 및 아프리카 대표들은 CPGB가 인도와 아일랜드 식민지 문제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22]
2. 2. 제3기와 인민 전선 (1929-1939)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CPGB)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제3기' 동안 사회 민주당과 노동당을 '사회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어떠한 동맹도 금지했다.[22] 이 시기 CPGB는 노동조합 회의 산하 노조와 경쟁하는 독자적인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2] 아서 호너와 같은 웨일스 광부들의 공산당 지도자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기도 했다.[22]대공황 시기, 전국 실업자 운동(NUWM)을 이끌던 월 해닝턴과 해리 맥셰인 등은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차례의 행진을 주도했다.[22] NUWM은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으며, 1941년에 해산되었다.[22]
1930년대 중반,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집권 이후, 코민테른은 '인민 전선' 정책을 채택했다.[22] 이에 따라 CPGB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노동당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과의 동맹도 모색했다.[22]
1935년 영국 총선에서 윌리 갤러처는 스코틀랜드 서 파이프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6년 만에 CPGB 소속 첫 국회의원이 되었다.[23] 그는 노동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다.[23]
1930년대 동안 CPGB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유화 정책에 반대했다.[23] 거리에서는 오스왈드 모슬리가 이끄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맞서 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3] 아브라함 라자루스가 이끈 옥스퍼드 지부는 카팍스 전투 이후 옥스퍼드에서 파시즘의 부상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23]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1939-1956)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CPGB)은 국내의 네빌 체임벌린 정부와 국외의 나치 파시즘에 맞서는 양면 투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며 반전 입장으로 선회했다.[24] 이 과정에서 해리 폴리트와 J. R. 캠벨이 반대하여 해임되고, 팔메 다트가 당 서기장으로 교체되었다.[25]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자, CPGB는 소련 방어를 명분으로 전쟁 지지로 입장을 바꾸고 폴리트가 복귀했다. 이후 추축국 격퇴와 소련 지원을 위한 제2전선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 산업 현장에서는 파업을 반대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공동 생산 위원회를 지원했으며,[26] 윈스턴 처칠과 클레멘트 애틀리의 전시 내각을 지지했다. 동시에 인도 독립 운동과 식민지 독립을 강조했다.[27]
1945년 영국 총선에서 103,000표를 얻어 윌리 갤러처와 필 피라틴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28] 그러나 1950년 영국 총선에서 두 의원 모두 의석을 잃었다.[29] 1951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The British Road to Socialism)' 강령을 발표하여 평화적 사회주의 전환 가능성을 제시했다.[31]
전후 CPGB는 노동 운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국 광부 연합, 전기 노동 조합, 엔지니어 노동자 연합 등 주요 노조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32][33]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당내 분열을 초래했다.[35] 피터 프라이어와 같은 주요 인사들이 탈당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28]
사무총장 (출생–사망) | 취임 | 퇴임 | 총리 |
---|---|---|---|
라자니 팔메 더트(Rajani Palme Dutt) (1896–1974) | 1939년 10월 | 1941년 6월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
해리 폴리트(Harry Pollitt) (1890–1960) (2번째) | 1941년 6월 | 1956년 5월 13일 |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
처칠 | |||
앤서니 이든(Anthony Eden) |
연도 | 이름 | 장소 | 날짜 | 중앙위원회 |
---|---|---|---|---|
1943 | 제16차 대회 | 런던 | 10월 3–4일 | |
1944 | 제17차 대회 | 쇼어디치 타운 홀, 런던 | 10월 28–29일 | |
1945 | 제18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11월 24–26일 | |
1947 | 제19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2월 22–24일 | |
1948 | 제20차 대회 | 런던 세이모어 홀 | 2월 21–23일 | |
1949 | 제21차 대회 | 리버풀 | 11월 26–28일 | |
1952 | 제22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4월 11–14일 | |
1954 | 제23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4월 16–19일 | |
1956 | 제24차 대회 | 배터시 타운 홀, 런던 | 3월 30일 – 4월 2일 |
2. 4. 쇠퇴와 분열 (1957-1991)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많은 당원들이 탈당했고, 당 내부에서는 노선 갈등이 심화되었다.[35] 1960년대 중소 분쟁의 여파로 친중국 분파가 떨어져 나갔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프라하의 봄)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른바 '탱키' 논쟁이 벌어졌다.[58][59] '탱키'는 소련의 강경 노선을 지지하는 당원들을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58][59]1970년대에는 유럽 공산주의 세력이 당내에서 성장하면서, 노동조합 중심의 전통적인 노선과 갈등을 빚었다. 1977년에는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둘러싼 논쟁 끝에 반수정주의, 친소련 성향의 영국 신공산당이 분리되어 나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지도부와 이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고, 1988년에는 반대 세력이 영국 공산당을 창당하며 분열되었다. 결국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영국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좌파 싱크탱크인 '민주 좌파'로 전환되었다.
3. 주요 정책 및 이념
марксизм-ленинизм|마르크스-레닌주의ru를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고, 코민테른과 긴밀히 협력하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혁명적 노동 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목표로 했으나, 1951년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강령을 통해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사회주의 이행 노선을 제시했다.[31] 노동조합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노동자 계급의 권익 보호와 사회주의적 정책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며, 식민지 독립 운동을 지지했다.[27] 파시즘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32][33]
4. 평가 및 유산
영국 공산당(CPGB)은 영국 사회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확산시키고 노동 운동과 반파시즘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9] 그러나 스탈린주의, 소련의 대외 정책 옹호, 잦은 노선 변경과 분열 등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50]
192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1석의 하원 의석을 확보한 이후,[49] 1945년 총선에서는 2석을 획득하며 가장 큰 지지를 얻었다.[53] 그러나 이후 선거에서는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점차 쇠퇴했다.
선거 연도 | 총 득표수 | 득표율 | 당선 의석 수 |
---|---|---|---|
1922 | 30,684 | 0.2% | 1 |
1923 | 34,258 | 0.2% | 0 |
1924 | 51,176 | 0.2% | 1 |
1929 | 47,554 | 0.2% | 0 |
1931 | 69,692 | 0.3% | 0 |
1935 | 27,177 | 0.1% | 1 |
1945 | 97,945 | 0.4% | 2 |
1950 | 91,765 | 0.3% | 0 |
1951 | 21,640 | 0.1% | 0 |
1955 | 33,144 | 0.1% | 0 |
1959 | 30,896 | 0.1% | 0 |
1964 | 46,442 | 0.2% | 0 |
1966 | 62,092 | 0.2% | 0 |
1970 | 37,970 | 0.1% | 0 |
1974 (2월) | 32,743 | 0.1% | 0 |
1974 (10월) | 17,426 | 0.1% | 0 |
1979 | 16,858 | 0.1% | 0 |
1983 | 11,606 | 0.0% | 0 |
1987 | 6,078 | 0.0% | 0 |
당내 노선 대립으로 인해 레닌주의 파인 그레이트브리튼 공산당 (임시중앙위원회)와 친소련 파인 영국 공산당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결국 1991년, 영국 공산당은 해산되었으나, 그 유산은 여러 분파 정당들과 좌파 단체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5. 주요 인물
(출생–사망)
(1884–1944)
(1894–1969)
(1890–1960)
(1번째)
(1896–1974)
(1890–1960)
(2번째)
(1911–1977)
(1924–2011)
(1956–)